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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 022 <일본 위스키 100년-1편>
단 6개월 간 수익률 2,600%. 3,600만 원을 투자해 9억 4,500만 원을 번 사람이 있죠. 워렌 버핏도 울고 갈 이 투자의 귀재는 누구일까요?
사실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투자의 ‘종목’이 무엇인지가 중요하죠. 바로 ‘야마자키 55년’입니다.
(대한민국은 주류의 개인 거래가 불법입니다)
그러나 위스키는 와인과 다르게 단기간에 결과가 나오는 술도 아닌 데다, 만드는 과정은 훨씬 복잡했습니다. 발효뿐만이 아니라, 증류와 숙성까지 이루어져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토리이 신지로는 스코틀랜드로 유학을 다녀온 데다, 실제로 스코틀랜드 위스키 증류소의 마스터 디스틸러를 역임한 경험이 있던 ‘다케츠루 마사타카’ 를 영입합니다.
다케츠루 마사타카는 스코틀랜드와 비슷한 환경인 홋카이도에 위스키 증류소를 짓자고 했으나, 토리이 신지로는 물류비용과 관광 사업 수입을 고려해 기존의 사업 기반인 오사카와 가까운 위치에 증류소를 짓자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해서 지어진 게 바로 오사카와 교토 사이에 자리한 ‘야마자키 증류소’이죠.
오사카와 교토 사이의 산자락에 자리잡은 야마자키 증류소
야마자키 증류소가 지어진 이후, 처음으로 나온 위스키는 ‘시로타쿠’, 하얀 라벨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위스키였습니다. 그러나 이 위스키는 맥아를 건조하는 데 쓰던 피트의 향이 너무 강해 판매량이 좋지 않았죠. 그 이후로 나온 ‘아카타쿠’, 붉은 라벨이라는 뜻을 가진 위스키도 그렇게까진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산토리의 위스키가 본격적으로 히트하게 된 것은 1937년, 토리이 신지로가 만든 ‘각진 병’ 이라는 뜻을 가진 ‘가쿠빈’ 이 출시되고서였죠. 피트를 최소화한, 부드럽고 달콤한 이 일본 위스키는 일본인들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았습니다. 산토리의 위스키가 시작된 이후, 15년이라는 시간 동안 일본인들의 입맛을 끊임없이 연구한 결과였죠.
당시의 가쿠빈 홍보 포스터
그러나 일본의 위스키 붐은 그렇게 오래가지는 않았습니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된 태평양 전쟁은 일본 경제를 고사시켰고, 산토리의 야마자키 증류소에 근무하던 사람들은 공습을 피해 증류소의 뒷산에 땅을 파고 숙성된 위스키를 숨겼습니다.
이때 오래 숙성된 위스키들은 전쟁 이후의 위스키 붐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죠. 전후에 일본이 빠르게 복구되며, 다른 위스키보다 저렴하고 맛도 좋은 산토리 위스키는 다시금 인기를 끌었습니다.
1935년에 산토리에서 퇴사한 다케츠루 마사타카가 세운 ‘닛카’의 위스키 또한 일본 위스키의 한 축을 맡았고, 이러한 지속적인 경쟁은 일본 위스키가 계속 발전하도록 도왔습니다.
그 결과, 1961년에는 스카치, 아이리시, 캐나디안, 버번과 더불어 ‘재패니즈’ 위스키라는 카테고리가 생겼습니다. 전 세계가 일본 위스키 시장을 인정한 것이죠.
일본 위스키의 두 거두, 토리이 신지로와 다케츠루 마사타카
1970, 80년대 일본의 버블 경제에 힘입어 일본의 위스키는 첫 번째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경제가 살아나면 술은 독해지고, 맛있어지고, 맑아지죠. 위스키의 소비량은 정점을 기록했죠. ‘출세 음주’라는, 출세하거나 승진할 때 그에 맞춰 마시는 위스키의 급을 올리는 암묵적인 규칙도 생길 정도로 산토리 위스키는 일본인들에게 너무나 친숙하고, 당연한 술이 되었습니다.
일본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브랜디를 포함한 일본의 위스키 생산량은 1965년에 연간 6만 9천㎘였지만, 1980년에는 위스키 생산량이 35만 1천㎘까지 올라갔습니다. 5배 이상 성장한 셈이죠.
그러나 버블은 버블. 언젠가 꺼지기 마련이었죠.
2편에서 이어집니다...! 다음 DM에서 만나요❤